
1·4 후퇴는 1951년 1월 4일 한국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다시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내주고 남쪽으로 대규모 후퇴한 사건으로, 전쟁이 단기 종결 가능성을 완전히 잃고 장기 교착전으로 전환되는 기점이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으나, 중공군의 본격적 개입 이후 유엔군은 연속적인 공격을 받으며 수도권을 방어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1·4 후퇴는 군사적 결정이었을 뿐 아니라, 수백만 민간인이 혹한 속 피난길에 오르는 비극을 낳았다. 이 시기 전쟁은 빠른 공세·후퇴의 반복에서 벗어나, 고지 쟁탈전과 소모전 중심의 교착 상태로 정착했다. 이 글은 1·4 후퇴의 배경, 전개, 사회적 충격, 그리고 전쟁의 성격이 변화한 과정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전세의 두 번째 붕괴,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순간
1950년 겨울 장진호 전투와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 이후 유엔군과 국군은 급격한 후퇴를 감행했다. 이미 서울은 북한군에게 한 차례 점령된 적이 있었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이를 되찾으며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했지만, 중공군의 조직적 공세는 그 흐름을 단숨에 뒤집어 놓았다. 1951년 1월 초, 중공군은 야간 기습·은밀한 침투·산악 포위 전술 등을 활용해 유엔군의 방어선을 압박했고, 결국 북한군과 합세하여 수도권 전체를 다시 위협하기 시작했다. 유엔군은 전방 유지보다 병력 보전과 재편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대규모 후퇴를 결정했다. 1·4 후퇴는 단순한 군사 후퇴가 아니라, 한국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수 없음을 확인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수도를 두 번째로 잃는 충격은 군과 국민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1·4 후퇴의 전개와 민간인 대피의 비극적 상황
1·4 후퇴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그 과정은 엄청난 혼란과 희생을 동반했다. 중공군은 수적 우위를 활용해 남하하며 유엔군의 후방을 압박했고, 국군과 유엔군은 이를 막아내기 위해 후방 재정비 및 방어선을 새롭게 구축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가장 큰 피해는 민간인이었다. 중공군이 서울로 진입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백만 명의 시민이 혹한 속에서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기온은 영하로 떨어졌고, 식량과 의복은 부족했으며, 열차·트럭·도보로 이동하는 피난민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전쟁 초기의 ‘한강 철교 폭파’가 혼란의 상징이었다면, 1·4 후퇴는 ‘민간의 대탈출’이 한국전쟁의 또 다른 상징이 되었다. 가족이 흩어지고 생필품 공급이 끊기며 사회는 심각한 붕괴 상태에 놓였다. 한편 군사적으로는 후퇴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남쪽에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후 유엔군은 점차 전세를 안정화시키고 다시 북진을 시도하며 서울을 재수복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4 후퇴 이후 전쟁은 더 이상 ‘속도전’이 아니었다
1·4 후퇴는 군사적 후퇴 이상의 충격을 남긴 사건이었다. 서울을 다시 빼앗기며 남한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경험했고, 전쟁이 단기 종결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후 전쟁은 낙동강 방어선 시기처럼 일방적인 밀고 당기는 구도가 아니라, 고지 쟁탈전과 제한적 공세가 반복되는 교착전으로 변화했다. 1951년 이후 전쟁은 전면적 진격보다 전선을 유지하고 고지를 확보하는 소모전 중심으로 전환되었고, 이는 휴전 논의가 시작되는 계기로 이어졌다. 1·4 후퇴는 한국전쟁이 ‘초기 공세 전 → 인천상륙작전의 역전 → 중공군 개입 → 재후퇴 → 교착전’이라는 구조로 변화하는 중간 지점이었다. 피난민의 고통과 수도 재함락의 충격은 한국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지만, 동시에 이후 제반 격과 휴전 기반을 형성하는 과정의 한 부분이 되었다. 1·4 후퇴는 한국전쟁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꾼 분기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