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황은 유엔군과 국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며 전쟁은 마치 조기 종결될 것처럼 보였다.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했고, 압록강 인근까지 진출하며 한반도 전체를 다시 통일할 기세였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중국이 전쟁에 참전하며 상황은 급격히 뒤바뀌었다. 특히 1950년 겨울 장진호 전투는 혹한·지형·중공군 매복 전략이 결합된 초유의 전투였으며, 유엔군이 처음으로 큰 규모의 후퇴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장진호에서의 치열한 전투와 중공군 물량 공세는 유엔군 북진 전략을 무너뜨렸고, 전쟁은 다시 장기전·교착전으로 변모했다. 이 글은 중공군 참전의 배경, 장진호 전투의 과정, 그리고 전세 재역전이 한국전쟁 전체에 남긴 의미를 심층적으로 다룬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 새로운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1950년 가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재탈환, 그리고 북진 성공으로 유엔군은 전쟁의 종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압록강에 도달한 미군과 국군은 “크리스마스 이전 종전”을 낙관했으며, 북한의 저항 능력은 크게 약화된 듯 보였다. 그러나 이 낙관 속에는 치명적인 변수 하나가 빠져 있었다. 바로 중국의 움직임이었다. 중국은 압록강 인근까지 미군이 진출하는 상황을 국가적 위협으로 인식했고, 마오쩌둥은 결국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중공군은 조용히 병력을 이동시키며 유엔군이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대규모 공격을 준비했다. 바로 이 단계에서 전쟁의 중심이 된 것이 **장진호 전투**였다. 이 전투는 혹독한 겨울과 험준한 산악지형 속에서 벌어진 처절한 교전이었고, 유엔군은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전략적 후퇴를 선택해야 했다. 전세는 다시 북한과 중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한의 장진호 전투와 중공군의 매복전술이 만든 전세 역전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함경남도 장진 군 일대에서 벌어졌다. 이 지역은 해발이 높고 겨울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 지대였으며, 유엔군은 미 해병 1사단을 중심으로 북진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이미 이 지역에 매복해 있었다. 그들은 혹한을 견디며 수만 명 규모로 산악지형 곳곳에 숨어 있었고, 유엔군이 북진을 지속하도록 유도한 뒤 완전히 포위하는 전략을 펼쳤다. 11월 말, 중공군은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고, 유엔군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전차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 놓였다. 총기와 장비는 얼어붙고, 병사들은 동상으로 쓰러졌다. 장진호 전투는 단순한 충돌이 아니라, 생존을 건 철수 전이었다. 미 해병대는 ‘돌파, 후퇴, 재집결’이라는 규율 아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눈보라 속을 전투하며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 철수 작전은 군사적으로는 후퇴였지만, 포위된 병력을 대부분 구출했다는 점에서 전략적 철수의 성공 사례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전투는 유엔군의 북진 전략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상징했다. 중공군의 물량 공세는 압도적이었고, 유엔군과 국군은 전면적인 남하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1950년 후반 한국전쟁은 다시 북한·중공군이 주도권을 잡는 국면으로 들어갔다.
장진호 전투는 한국전쟁을 장기전으로 바꾼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장진호 전투와 중공군의 참전은 한국전쟁 초기의 ‘통일 가능성’을 단숨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전세는 북진에서 후퇴로, 승리에서 교착으로 전환되었고, 전쟁은 더 이상 단기간에 끝날 수 없는 장기전의 구조로 변모했다.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빼앗기며 크게 밀렸고, 이후 재탈환과 공방전이 반복되면서 한반도는 혹독한 소모전에 들어갔다. 이 변화는 한반도 군사 지형뿐 아니라 정치·외교적 동맹 관계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장진호 전투는 패배와 고난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극한 상황에서 부대 대부분을 구출한 ‘기적의 철수’로도 평가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전투가 한국전쟁 중반 이후의 교착 상태를 형성한 기점이었다는 점이다. 혹한과 포위, 기습과 후퇴가 뒤섞인 장진호 전투는 한국전쟁이 단순한 남북전쟁이 아니라 국제전쟁의 본질을 띠게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