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8월 광복 이후 조선은 해방의 기쁨과 함께 새로운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갔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일제의 행정·경찰·경제 체계가 붕괴하고, 새로운 국가 운영 시스템은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미군정(USAMGIK)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하게 되었고, 조선 사회는 정치·경제·사회 전반에서 다시 출발해야 했다. 각종 식량난, 치안 불안, 좌우 갈등, 미군정의 정책 혼선까지 겹치며 혼란은 가중되었다. 동시에 노동운동·교육 개혁·정당 창당·자치 조직 결성 등 다양한 재건 시도도 등장했다. 이 시기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토대가 된 중요한 과도기였으며, 해방의 환희와 혼란이 공존하던 전환기였다.
광복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혼란의 시작이었다
1945년 조선은 마침내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지만, 국가 운영 체계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식민지를 탈출한 것은 맞았지만, 그 뒤를 채울 정부·헌법·행정·치안·경제 구조는 비어 있었다. 일본인 관료와 경찰은 도망가거나 체포되었고, 조선 내부에는 이를 대체할 행정 기반이 없었다. 여기에 미군정이 들어오며 조선인 주도의 자치 의지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해방의 감격 속에서도 사회는 불안정했다. 식량은 부족했고, 귀환 동포·징용 피해자·학도병·만주·일본에서 돌아온 수백만 명이 갑자기 조선 땅에 밀려들었다. 취업·주거·치안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좌우 진영이 각기 다른 국가 비전을 내세우며 갈등이 폭발했고, 미군정과의 관계에서도 충돌이 이어졌다. 조선은 독립했지만, 자립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 시기는 “광복의 기쁨과 혼란이 동시에 존재했던 시대”였으며,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기초를 만들기 위한 치열한 과도기의 시작이었다.
정치·경제·사회 혼란 속에서 시작된 새로운 재편 과정
먼저 **정치적 혼란**이다. 해방 직후 조선 곳곳에서는 인민위원회·자치조직·정당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좌익 세력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우익 세력은 건국준비위원회 중심으로 국가 재건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직접 행정을 운영하면서 조선인 지도 세력과 충돌이 일어났다. 둘째, **경제 붕괴**이다. 일본이 물러나면서 공장·금융·수송 체계는 마비되었고, 생산량은 급감했다. 식량난은 전국적 문제였고, 귀환동포가 늘어나며 생활고는 더욱 심각해졌다. 미군정의 경제 정책은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못했고, 물가 폭등과 실업난이 이어졌다. 셋째, **치안과 사회 문제**다. 경찰력은 부족했고, 일본인 경찰을 그대로 활용한 미군정 정책은 국민의 반발을 불러왔다. 범죄는 증가했고, 지역마다 무장세력 충돌이 이어졌다. 넷째, **좌우 이념 갈등의 심화**다. 미소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조선 내부에서도 좌우 충돌이 격화되었고, 이 갈등은 이후 한국전쟁의 씨앗이 되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재편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교육개혁, 노동조합 조직, 언론 창간, 지방 자치 시도, 농지 문제 해결 등 여러 활동이 이루어졌다. 혼란 속에서도 조선은 스스로 새로운 국가의 틀을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혼란의 시대였지만, 대한민국이 태어나는 과정이었다
미군정기 3년은 혼란과 갈등, 좌절과 시도가 모두 뒤섞인 시기였다. 하지만 이 혼란 속에서 대한민국의 행정 구조·정당 체계·경제 시스템의 기초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미군정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정책을 펼치며 혼선을 낳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근대적 법률·행정 제도·교육 체계를 정비하는 계기도 마련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시기가 조선인 스스로의 ‘국가 만들기’를 시작한 첫 단계였다는 것이다. 혼란 속에서도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지식인·노동자·학생·농민·종교인의 노력은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며 하나의 결실을 맺는다. 광복 직전의 독립운동이 미래를 위한 투쟁이었다면, 미군정기는 그 미래를 현실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혼란은 컸지만, 바로 그 혼란이 대한민국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역설적인 토양이었다.